Ban Chiang Museum

UNESCO World Heritage Site

Ban Chiang Museum

반치앙은 기원전 제5천년기(第五千年期, 5th millennium)에 인류의 문화적·사회적·기술적 진화의 두드러진 현상을 나타내는 중심지였다. 동남아시아의 이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진화는 모든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. 이곳이 지금까지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된 정착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선사시대 정착지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. 이 유적은 이 지역의 농경 생활과 철기 제작 및 사용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. 오랜 문화적 연속성, 규모 및 경제 활동에 대한 증거 등은 이 지역 내에 있는 동시대 유적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.

1960년대까지, 선사시대의 동남아시아는 문화적으로 퇴보했던 것으로 여겨졌다. 일반적인 견해는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발달은 주로 북쪽의 중국과 서쪽의 인도로부터 온 외부 영향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. 그러나 최근 녹녹타(Nok Nok Tha)와 타이 북동쪽 코랏(Khorat) 고원의 반치앙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작업은 이러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. 오늘날 타이의 이 지역은 발굴과 현지 조사를 통해 기원전 제4천년기 문화 발전의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. 또한 북쪽으로는 중국으로부터, 서쪽으로는 인도로부터, 또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와 인도네시아의 열도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발한 문화적 발달이 이루어진 중심지였다.

코랏 고원의 정착지는 기원전 3600년경에 인근 저지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. 정착민들은 사육된 소, 돼지, 닭을 이용한 정착 농업과 초보적 방식의 건식 벼농사(dry-rice cultivation)가 발달했던 수렵-채집 경제를 도입했다. 반치앙에서 이러한 초기 정착 마을 생활은 기원전 10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.

주택 건설과 도자기 제조 같은 기술들과 함께 농사 기술이 세련되고 향상되었다. 장례 설비는 점차 복잡해지는 사회 구조를 반영하였다. 이 시기에 청동 사용이 증가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한데, 초기에 무기나 개인 장신구로 쓰이던 청동은 이후에 더 실용적으로 확산되었다.

중기(BC 1000~500/300)에는 습식 벼농사(wet-rice farming)가 도입되었음이 물소 뼈의 존재로 증명되었다. 또한 이 시기에는 도자기 및 철기 생산이 기술적으로 눈에 띄게 발전했다. 철이 도입되어 일상적으로 사용된 것과 분묘 부장품에서 볼 수 있듯이, 이 시기는 상당한 번영을 누리던 때였다. 후기(BC 500/300~200/300)에는 더 많은 사회적·기술적 발전이 있었으며, 특히 도자기 디자인과 생산이 두드러진다.

반치앙의 정착지 발달은 3세기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. 그러나 논 마웅(Non Maung)과 반 프라삿(Ban Prasat)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 16세기와 그 이후까지 정착지가 유지되었다. 하지만 반치앙은 코랏 고원 지역에서 주요한 주거지로 간주되었고, 독특한 고고학적 문화로 이름을 남겼다. 많은 동시대의 유적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, 이 가운데 일부 유적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.

이 유적은 18세기 후반 라오스 난민들이 정착한 근대적인 마을 바로 아래에 있다. 이 선사시대 거주 유적은 1.3㎞까지는 500m가량의 타원형의 낮은 언덕이다. 이 주거지 유적은 매우 제한된 발굴만이 가능하지만, 이 지역은 깊은 층화(層化)와 오랜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 주는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.

주요 발굴은 현대적인 마을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. 이 마을에서는 도자기와 금속으로 된 분묘 부장품이 풍부하게 매장된 전 시대에 걸친 수많은 묘지들이 발견되어 기록되었다. 발굴지 가운데 한 곳은 방문객 관람을 위해 상시적인 보호 건물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. 이 마을의 또 다른 곳에는 훌륭한 유적 박물관이 있다.
[네이버 지식백과] 반치앙 고고 유적 [Ban Chiang Archaeological Site] (유네스코 세계유산, 유네스코한국위원회(번역 감수)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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